우리가 매트릭스 속에서 할 수 없는 것

NFS
2019-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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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인큐베이터


워쇼스키 남매의 1999년 영화 매트릭스는 생각거리를 많이 남겼다. 붓다, 장자, 플라톤, 데카르트, 말브랑슈, 버클리, 흄 등 동서고금 사상에서 다루고 있던 인식론 및 존재론 주제들을 SF 차원에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은 1981년 논문 “통 속의 두뇌”에서 슈퍼컴퓨터에 의해 특정 경험을 하도록 조종 받는 두뇌를 이야기한다. 심지어 그는 이 논문에서 모든 사람들이 통 속의 두뇌가 되는 상황을 설정하기도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두뇌, 신경조직, 신경사건들만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자동기계라고 상상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가 이런 사고실험을 했던 까닭은 ‘안다’, ‘가리킨다’, ‘뜻한다’ 등이 무엇을 뜻하는지 성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인큐베이터에 갇혀 거대한 기계 시스템에 의해 특정 경험을 하도록 조종 받는 사람들과 거기서 벗어나 기계와 싸우는 또는 기계와 화해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물론 SF는 그냥 허구로 들어야지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매트릭스의 상황을 이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불행히도 이로부터 사람들은 ‘안다’는 것, ‘말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된다.

매트릭스에 따르면, 태어날 때부터 인큐베이터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기계 시스템을 통해 이런 저런 경험을 하도록 충분히 자극을 주면, 사람은 생각하는 자아로 성장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외부 사물을 인식하며 타인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사람이 인큐베이터에서 탈출하자마자 그는 생각하고 말하고 인식할 수 있었다. 비전문가뿐만 아니라 심지어 철학자, 과학자, 공학자들까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매트릭스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여긴다. 그들은 이러한 배경 믿음을 가진 채 사람의 인지, 인식, 사고, 언어, 인공지능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통 속에 들어간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인큐베이터에 갇혀 있던 사람은, 기계 시스템에 의해 이런 저런 경험을 하도록 충분히 자극받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타인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생각 자체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단순히 두뇌 내부의 신경 사건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만이 태어날 때부터 매트릭스 안에 갇힌 이들도 데카르트 식 자아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인큐베이터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의미를 가진 표현을 스스로 출력하고 의도를 갖고 행위한다. 하지만 만일 태어날 때부터 매트릭스 안에 갇힌 사람이 생각할 수 없다면, 인큐베이터에서 탈출하자마자 생각하고 말하고 의도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말, 생각, 앎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한, 생각한다는 것은, 말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은, 개체 내부 또는 시스템 내부의 신경 사건 차원에서 일어날 수 없다.

한 개체가 생각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만족되어야 한다. 한 개체는 다른 개체와 구별될 수 있을 만큼 개별화된 몸을 가져야 한다. 한 개체와 다른 개체 사이에 충분히 열린 공간이 있어서 그 공간에 공통의 사물들이 놓일 수 있어야 한다. 한 개체는 다른 개체가 주목하고 있는 대상을 감각할 수 있을 만큼 민감한 감각 기관을 가져야 한다. 한 개체는 자신이 때때로 다른 개체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곤 한다는 것을 감지할 만큼 다른 개체의 반응들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공통 공간 내에 공통 사물들, 그것을 함께 감각하는 다른 개체들, 자신과 다른 반응들로부터 오류 개념을 갖는 것 등이 말하고, 생각하고, 아는 사건이 생기는 바탕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바탕 위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아는 존재로 여태 자라왔다. 통 속의 두뇌들, 매트릭스에 갇힌 몸들은 이러한 바탕의 일부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생각할 수 없으며 말할 수 없으며 알 수도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말하고 생각하는 기계에 대해 쏟아지는 최근 담론들은 오류들로 점철되어 있다.


통 속의 뇌 가설을 제시한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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