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연_좀 작아도 오래 일할 수 있는 그런 회사에 들어가고 싶은데

NFS
2019-08-05
조회수 29


백승연(1994년생)

  • 인터뷰 날짜: 2019년 5월 25일 
  • 직업: 취업준비생
  • 거주도시(기간): 미시시피 웨스트포인트(10개월), 노스캐롤라이나 올드셀럼(4년), LA(4년) 
  • 사용언어: 한국어/영어


Q. 미국을 가게 된 계기?

저는 막 그 때 어학연수나 유학 같은 게 붐이 있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간 케이스는 아니었고. 엄마가 어학연수의 목적으로 가봐라 이런 느낌이 아니고, 중앙일보였나 조선일보였나 교환학생 프로그램 공고 같은 게 떴었는데, 그걸 보고 엄마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 안 하고 해볼래? 해서 해볼까? 해서. 근데 10개월이 너무 짧게 느껴지고 더 있어볼까 싶어서 고등학교라도 마쳐볼까 해서 좀 길어진 케이스? 대학 진학 해볼까? 해서 대학 진학하고. 계획은 없는데 상황에 따라 길어진 케이스에요. (웃음) 흘러 흘러서. 


Q. 결국엔 잘 있다 온 것 같아요?

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지만. 


Q. 어떤 점이?

제일 크게는 생각해보면 제가 거기 계속 있고 싶은 이유가 교육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미국 시 교육? 제가 생각해도, 물론 제가 한국 고등학교 시스템을 어쨌든 모의고사도 몇 번 보다 말고 갔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제가 수능을 본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 3학년까지의 그런 교육과정을 밟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한국적인 교육과정을 봤을 때는 뭔가 미국이랑 차이가 있었으니까, 좀 거기에 매료가 돼서 길어진 것 같아요. 유학생활이. 꼭 다 그런 건 아니고 저한테 맞았던 것 같은 게, 제일 큰 게 한국은 Lecture식 스타일이면, 미국은 좀 선생님이 물어보면 제가 대답해야 되고 토론을 해야 되고 논쟁을 해야 되고 대화를 요하는 스타일인데 그게 저한테 좀 더 맞았던 것 같아요. 


Q. 그게 본인의 성격이나 가치관 등에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네. 확실히 제가 원래 소심한 성격은 아니긴 했었지만, 되게 적극적인 활동 같은 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운동도 그렇고, 동아리도 그렇고. 그런 걸 되게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좀 그런 걸 억지로 해라 이런 분위기가 아니라,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환경이었다 보니까 저도 변했던 것 같고 긍정적으로 잘 됐던 것 같아요. 


Q. 왜 웨스트포인트로 갔어요?

미시시피의 웨스트포인트라고 진짜 깡촌인데, 거기에 한국인은 저 밖에 없었어요. 백인 아니면 흑인이었어서 다들 저를 신기해하는? (웃음) 왜 갔냐면, 그게 제가 가고 싶은 동네를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제 정보를 미국 곳곳에 뿌리는 거에요. 호스트 과정에서 만약에 제가 마음에 들면 저를 뽑는 건데, 그게 미시시피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가족들 중 한 명이 제가 마음에 들어서 제가 거기에 가게 된 거죠. 그 때는 좀 황당하긴 했는데, 네. 그랬었어요. (웃음)


Q. 거기는 어떤 곳이에요? 시골인 거에요?

엄청 시골이에요. 우리 나라로 치면 강원도 강릉도 아니에요. 영월? (웃음) 이런 커피체인점도 없고 스타벅스도 멀리 가야 있고. 스타벅스는 사실 미국 브랜드니까 어딜 가도 있어야 되는데 없더라고요. 맥도날드? 그 정도? 그 정도는 있는데 그 이상이 없고, 아파트 없고, 주택이 있는데 주택도 주택과 주택 사이가 되게 먼? 땅덩어리가 되게 크니까, 차타고 몇 분을 가야 집이 보이고. (웃음) 뭐 약간 사냥하는 분들도 많았고. 그래서 되게 사냥복 입은 아저씨들도 되게 많았어요. 그래서 아, 여기 진짜 깡촌이구나. 생각했죠. (웃음)


Q. 자연이 되게 좋았겠네요?

네. 근데 자연이라고 하기에는 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약간 허허벌판? 그래서 뭐 시즌 때는 허리케인 같은 것도 오고. 그래서 자연이라는 느낌보다는 되게 허허벌판이었어요. 


Q. 거기서 학교를 다닌 거죠? 

네. 거기서 고등학교를 10개월 다닌 거죠. 소위 말해서 문화체험, 호스트 가족들이랑 10개월을 같이 지낸 거니까 그 사람들과의 교류? 그게 되게 컸어요. 그 때 영어가 제일 많이 늘긴 했는데. 


Q. 인종차별 같은 건 없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동양인이 그래도 막 조금이라도 서너 명이라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동양인이 저 밖에 없으니까 약간 신기해했고, 일단 제 호스트 가족이 진짜 정말 백인이에요. 파란눈동자에 금발. 다섯 가족인데 되게 저한테 잘해줘서, 그 친구랑 같이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걔랑 같이 다니니까, 저 보다 두 살 어린 애였는데 걔가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치어리더라서 그 친구가 저를 지켜주는 느낌? 그래서 인종차별이라는 느낌보다 신기해해서 저랑 같이 놀고 싶어 하는 느낌이 컸어요. (웃음) 약간 동물원에 가면 신기한 동물보고 신기해하는 그런 느낌? 코리아가 어디냐고 묻기도 하고. 차이나는 들어봤는데 코리아는 어디냐고도 물어보고 김치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그 때는 한류 같은 게 별로 없어서 더 몰랐던 것 같아요. (김치는 아네요?) 김치도 몰랐어요. 근데 제가 알려주면서 알게 된 거죠. 원래는 몰랐어요.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 있어요? 본인한테 영향이 컸던 일이라든가. 

제가 향수병이 절대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 8개월 째인가에 고비가 오는 거에요. 갈 때 되니까 싱숭생숭 해지고. 되게 신기한 규칙이었는데, 3개월에 한 번씩 부모님하고 전화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나 그랬어요. 맨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부러 그런 것 같은데. 그 때 그래서 하고 싶은데도 3개월에 한 번씩 밖에 안 됐던 이유가 그 때는 이런 스마트폰이 아니어서 집전화를 쓰는 데도 있고 그랬었는데, 한 번 허리케인이 와서 케이블 선이 다 끊긴 거에요. 그걸 고치는 데도 시간이 걸리니까, 전화를 못 하는 거에요. 그나마 손편지로 쓰기도 했지만, 이메일도 쓰고. 전화나 얼굴을 볼 수 없으니까 그래서 향수병이 왔던 것 같아요. 그 끄트머리에. 그래서 약간 싱숭생숭하고 기분이 안 좋고 그러니까, 한 번 날을 잡아가지고 그 가족이, 3시간인가 4시간 운전을 해서 저를 한식당을 데려다 준거에요. 심지어 다른 주에. 미시시피주도 아니에요. 테네시주인가? 아무튼. 그 때는 엄마아빠 목소리 듣고 싶은데 못 들어서 속상해서 그랬던 게 이 사람들은 음식을 못 먹어서 그러나? 해서 같이 먹고 기분이 되게 좋았던 게 기억이 나요. 서프라이잖아요. 저한테는. 그래서 고등학교 옮기고 나서도 다시 한 번 놀러 가고, 이번에 귀국하기 전에도 들렸다 왔는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백인들은 정이라는 문화가 우리나라 보다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런 게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은 되게 피부색만 다른 가족? 같은 느낌이 커요. 



Q. 그럼 그 때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시 미국을 간 거에요?

들어왔다가 뭔가 고등학교를 애매하게 끝내고 오니까, 뭔가 애매하다. 끝내고 온 게 아니라 중간에 온 거고 복학을 해야 되니까, 애매해서 그럼 옮겨볼까? 해서 고등학교를 끝내고 올까? 덧붙여서 이왕 옮기는 김에 공부하는 학교로 가볼까? 해서 알아봐서 다른 주로 갔어요. 


Q. 다른 주로 간 이유는 뭐에요? 너무 시골이어서?

그것도 있고요. (웃음) 그게 조금 충격적이었는데 그 때는 미시시피가 워낙 깡촌이고 고립되어 있다 보니까 저한테는 인종차별이 없었는데, 흑인들 인종차별이 남아있어서 솔직히 제 눈에 그게 좋아보이지는 않더라고요. 제 호스트가족인 여자애랑 같은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그 학교가 99%가 백인이에요. 그 중에 한 두명 흑인들이 다녔던 것 같은데, 얼마 못 다니고 그만 두는 애들도 있었고. 그리고 뭐가 충격이었냐면 그냥 학교 나와서 길을 가는데, 옆에 학교가 또 있더라고요. 여기도 학교가 있었네? 하고 봤는데 그 학교는 다 흑인인거에요. 그 중에 한 두명 또 백인이 있어요. 뭔가 법은 아닌데 암묵적으로 벽을 친 느낌? 그래서 거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여기 있다가는 좀 아닐 것 같다 해서 옮겼어요. 다른 데서 교육을 받아보자. 


Q. 인종차별에 예민해지거나 그랬어요? 

네. 왜냐면 저한테는 없었는데, 그 가족들도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은 장난식으로 얘기하는 건데도 제가 불편한 게 있었는데 예를 들면, 막 그런 게 너무 듣기 싫은 거에요. 만약에 저한테 방 같이 쓰던 호스트 친구랑 밤에 나가면, 밤 늦게 왜 나가 너네 위험해 흑인들이 막 너한테 총 쏠거라고. 막 그렇게까지 얘기를 하니까. 그 사람들은 장난식으로 얘기한거지만 저한테는 장난스러운게 아닌 거에요. 그게 화살이 만약에 저한테 돌아오면, 제가 인종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되게 상처잖아요. 그런게 약간 일상에 조금씩 조금씩 껴있어요. 쟤 왜 저렇게 무섭게 생겼어 막 이렇게 말하고. 흑인 보면 막 무섭게 생겼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다 좋았는데 그게 조금 그랬던 것 같아요. 좀 별로다. (웃음)


Q. 그래서 어디로 갔다 그랬죠?

노스캐롤라이나 인데, 거기는 좀 괜찮았어요. 차별 이런 문제에서 조금 자유로운 느낌? 왜냐면 거기는 중국인 유학생들도 좀 있었고 한국인 유학생도 있었고, 많지는 않았지만. 아프리카 유학생도 있었고. 그래도 좀 다양한 곳에서 온 애들이 많아서 그런지 차별이 좀 덜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여고여서 여자들끼리 모여서 으쌰으쌰하지, 그런 차별같은 건 좀 덜 했던 것 같아요. 


Q.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어떤 도시에 있었어요?

올드셀럼이라고, 우리나라로 치면 약간 안동 같이 되게 역사 깊은 그런 도시에요. 거기도 막 도시는 아니에요.  


Q. 그럼 옛날 가구도 많이 남아있겠네요?

네. 흔적도 많고 학교 자체도 미국에서 제일 오래 된 여자 기숙사 고등학교여서. (그게 마음에 들어서 간거에요?)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알고 보니 그렇더라고요. 저는 뭔가 그래도 공부하는 학교를 가야지 이래서 알아본 게 좀 됐었어요. 그 학교 뿐만 아니라, 테네시에도 있었고 버지니아에도 있었고, 노스캐롤라이나에 있고 막 이런데. 기숙사 있는 고등학교가 공부할 수 있겠다 해서 알아보는 중에 이 고등학교가 마음에 들었어요. 



Q. 미국에서 살다 온 친구들이 도시 이름으로 말하지 않고 주 이름을 말하더라고요. 원래 그런가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왜냐면 도시 이름으로 얘기하면 겹칠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워싱턴이라는 주가 있는데 또 워싱턴D.C도 있고. 헷갈리잖아요. 그래서 아예 주로 얘기해요. 저도 처음엔 헷갈리더라고요. 미시시피를 갔는데 제가 있었던 도시가 웨스트포인트 이긴 한데, 웨스트포인트라는 도시가 또 있는 거에요. 흔한 이름이니까. 그래서 이거 헷갈린다 싶었죠. 그래서 주 이름을 말하는 게 문화인 것 같아요. 덜 헷갈리기 위해서?


Q. 원하던 대로 공부를 많이 했어요?

아뇨. (웃음) 생각해보니까 제가 원하기는 했지만 그게 또 하다 보니 적성엔 안 맞더라고요. 당연히 공부 좋아하는 사람 없지만. 공부하려고 갔는데 공부 안했어요. (웃음) 그리고 거기서 뭔가 생각해보니 방황도 많이 한 것 같아요. 왜냐면 적성을 못 찾으니까.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몰랐거든요. 여길 오기는 했는데 내가 한국을 돌아가야 될지도 모르겠고, 한국엘 돌아가면 대학입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미국에 남아 있다고 해도 입시를 어떻게 또 해야 될지 모르겠고. 일단 미국 입시를 준비하려면 제가 뭘 해야 할지 정해놓고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걸 모르겠는 거에요. 근데 그게 또 저의 고민만은 아니었고, 거기 있는 친구들도 다 그랬기 때문에. 그래서 여차저차 하다가 돌고 돌고 찾은 길이 이제 미술이고 디자인이고 이렇게 돼서 된거죠. 전공이 그래픽 광고디자인 이 쪽이에요. 


Q. 그걸 찾게 된 과정에 대해서 얘기해줄 수 있어요?

뭔가 제가 막 낙서하고 그림 그리고 끄적끄적 거리는 건 좋아하긴 했는데, 근데 그런다고 다 미대 가지는 않잖아요. (웃음) 그래서 그냥 나는 그리기 좋아하고 낙서 좋아하고 그런 애구나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그게 미시시피에 있었을 때 호스트 가족들의 영향도 되게 컸던 것 같아요. 생일만 되면 늘 거기 할머니가 미술세트를 다 사주는 거에요. 너는 꼭 미술 해야 된다고. (왜?) 저를 되게 좋아해주셨는데, 생일만 되게 뭐를 많이 주셨는데, 색연필이나 물감 같은거 사서 더 그려봐라, 그려야 늘지 않냐 하면서 도와주셨던 것 같아요. 


Q. 재능이 보였던 거에요?

어쨌든 걔네들이랑 놀려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처음에 접할 수 있는 게 한국간식, 한국음악, 그게 소재가 고갈이 되다 보니까 내가 너 한 번 그려줘볼까? 하면서 얼굴 그려주고 그랬던 것 같아요. 호스트 가족들 그려주니까 다들 너무 좋아하는거에요. 그걸 보고 아 네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구나 라는 걸 인식하셨던 것 같아요 할머니가. 그 때부터 신경을 써주셨던 것 같아요. 색연필이나, 도구나, 그림 그리는 이벤트가 있거나 하면 그런데도 같이 가주고. 그렇게 해줬는데 그게 고등학교를 옮겨 가서 공부를 한답시고 하는데 그런 게 생각이 사실 안나는 거에요. 그림이고 나발이고 공부해야지, 시험치고 퀴즈보고 이런 거에 얽매이다 보니까 그런 게 안보였던 것 같아요. 제가 뭘 좋아하는지. 그러다가 고민을 많이 하다가 저랑 같이 방 쓰던 룸메이트가 한국인이었는데, 걔가 되게 신기하게 이공계적인 머리도 있는데 그림도 되게 잘 그려요. 제가 고민이랍시고 얘기를 했는데, 걔는 저한테 너는 그러면 미대 준비해보는 게 어떻겠냐 라고 말한 거에요. 걔도 심각하게 얘기를 한 게 아니고 그냥 말한 거에요. 그러다가 엄마랑 통화를 하면서 얘기를 한 게, 미대나 한 번 준비해볼까? 이렇게 된 거에요. 솔직히 말하면 제 유학생활에 계획이 없었어요. 엄마는 네가 아무것도 좋아하는 것 없이 공부만 해서 영혼없이 대학 가는 것 보다는 네 말대로 미대 준비해서 대학 가는 게 낫겠다 해서 가게 된 거에요. 그래서 알아보고 내가 일단은 어렸을 때부터 정식으로 미술을 배운 건 아니니까 화실도 다니고 도움을 받아서 입시준비를 했죠. 


Q. 올드셀럼에서는 그 기억 하나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아닌가?(웃음)

네. 맞아요. 이 학교가 미국이 생겨나기 전에 생긴 고등학교에요. 독일인 여자가 세운. 되게 오래된 학교라고 알고 있어요. 


Q. 그 지역이나 그 학교만의 특징적인, 기억나는 것 있어요?

진짜 행사가 많아요. 예를 들면, 하얀 원피스를 입어야 되는 날이 있어요. 모든 학생들이 하얀 원피스를 입고. 약간 우리나라 제사 의식 마냥 촛불 들고, 거기가 크리스천 학교였어요, 그런 뭔가 관련된 종교행사가 많았었어요. 근데 그게 종교적인 느낌보다는 학교가 되게 오래 돼서 일상 하는 행사 느낌? 의식 같은. 저도 생각해보면 그걸 왜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오래됐으니까 역사적인 학교니까 이런 거 해야지, 막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학교 나가면 약간 민속촌 같이 빵 만드는 아줌마들이 있어요. 우리나라 떡집같이. 전통 옷도 입고, 막 평상복 안 입고, 막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그런 드레스 있잖아요. 그런 옷 입고 빵 만들고 그래요. (웃음) 학교 자체가 워낙 오래 돼서 미국이라는 느낌보다는 오래 된 되게 유럽의 건물 같은 느낌? 그냥 오래된 목조건물. (웃음) (목조건물인데 어떻게 유지가 돼지?) 그래서 늘 보수공사를 하는거에요. 다니는 3-4년 내내 공사를 했던 것 같아요. 못 들어가는 곳도 있고. 


Q. 그 학교에서도 계속 시험보고, 퀴즈보고 이랬는데도 한국보다는 낫다고 생각을 들었어요?

그 때는 진짜 너무 싫었거든요. 벗어나고 싶고 왜냐면 늘 밤샘을 했었으니까. 늘 밤샘을 한 일주일에, 평균 자는 시간이 2-3시간 밖에 안 되는 거에요. 주말에 몰아서 자고. 그냥 일단은 퀴즈가, 선생님이 갑자기 우리 시험보자 이런 것도 되게 많았었고. 근데 그게 주관식인 경우가 되게 많고 이러다 보니까. 공부양이 되게 많았어요. 그래서 밤을 샜던 것 같아요. 에세이도 써야 되고. 에세이가 고역이죠. 에세이는 시간이 걸리니까. 에세이 쓰다가 시간 다 가고. 그래도 머리 좋은 애들은 금방 하고 금방 자는데 저는 오래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잠 못 자고. 주말에 몰아서 자고. 그리고 또 잠이 모자랄 수밖에 없는게, 수업 끝나고 무조건 스포츠를 가야되니까. 그래서 테니스 치러 가고. (웃음) 그러느라 그게 되게 싫었었는데, 또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교육을 또 받을 수 없잖아요. 한국에서는. 제 생각에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가치가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해요. 그래도 만약에 돌아가라고 하면 못 돌아가겠어요. (웃음)


Q. 거의 한국 고등학생 못지 않게 공부를 했네요?

맞아요. 근데 제가 고등학교를 잘 못 선택한 것도 있어요. (웃음) 괜히 공부하는 학교 그거에 꽂혀가지고. 그냥 평범한 고등학교 갈 걸, 그런거 있었어요. 


Q. 그래도 공부하고 운동도 하고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운동한 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왜냐면 지금도 저한테 영향이 오는 게 그냥 집에 있고 엉덩이 붙이고 누워있고 좋긴 한데, 그 나도 모르는 강박관념이라고 그러나? 운동해야 되는데, 운동해야 되는데 이러면서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많이 타요. 운동하느라. 


Q. 운동은 어떤 걸 좋아해요?

저 테니스. 고등학교 때는 테니스 하다가, 지금은 갈아탔어요. 조금 쎈 걸로. 무에타이. 근데 시작한지 얼마 안됐어요. 진짜 재밌는데, 너무 멍이 많이 나요. 아파요. (웃음) 남들 안하는거 해보고 싶다 해서 한 게 무에타이인데 정말 아무도 안하더라고요. 아저씨들밖에 안하더라고요. 하여튼. 그런게 좋은 것 같아요. 뭔가 활동적이긴 했어요. 고등학교 때



Q. 그리고 LA로 간 거에요? LA로 많이 가나 봐요, 대학을?

저는 원래 대학이 붙은 데가 메릴랜드주에 있는 학교랑 LA에 있는 학교였는데, 고민을 되게 많이 했단 말이에요. 어디로 갈지. 그래서 주변에 많이 물어도 보고, 결론은 저의 성향은 LA여서 가게 됐어요. 메릴랜드는 뭔가 학교가 왜 제가 가고 싶었냐면 학교 자체가 좀 더 수준있어 보였어요. 랭킹 자체도 그러기도 했고. 그래도 시스템이 더 좋은 학교를 가는 게 낫겠다 했는데, 또 메릴랜드가 또 엄청난 시골이에요. 다들 주변에서 너는 시골 지겹지도 않냐고 그러더라고요. 학교에서만 계속 있을 것도 아니고 나중에 일하고 활동할 것 생각하면 LA가 좋겠다 싶어서 갔어요. 그리고 좋았어요. (웃음)


Q. 계속 시골스러운 곳에 있어서 도시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원래는 별로 없었어요?

가고 싶다 라는 생각보다는 별로 그냥 도시 가고 싶다, 시골 가고 싶다 이런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그냥 어쩌다 보니 흘러가는 대로 계속 시골에 있었잖아요. 그냥 공부할 때는 시골에 있든 도시에 있든 상관이 없는데, 나와서 다양한 걸 경험하기 위해서는 도시가 좋다 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되게 많았어요. 그게 맞긴 한 것 같아요. 가서 정말 많은 걸 한 것 같아요. 다 좋은 경험은 아니지만 다양한 경험을 LA에서 한 것 같아요. 


Q. 좋은 경험 하나랑 안 좋았던 경험 하나 얘기해줄 수 있어요? 임팩트가 큰 걸로.

장단점이 많은데, 임팩트가 큰 건, 장점은 진짜 날씨가, 사람이 날씨 때문에 영향을 크게 받을 줄 몰랐어요. 날씨가 큰 것 같아요. 되게 좋거든요. 되게 좋은데 그게 아무리 안 좋다 하더라고 흐린 날이 있거나, 비가 몇 번 오거나 그러니까, 그래도 좋은 날이 너무 좋으니까 거기서 오는 에너지가 있어요. 거기서 오는 에너지가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제일 컸던 것 같아요. 왜냐면 도시라는 게, 여기 서울도 그렇지만, 도시가 엄청 특별한 건 없잖아요. 사람, 차, 음식점 많고. 그런 느낌이잖아요. LA도 그래요. 똑같은데, 날씨. 날씨는 비교할 수 없는 것 같고. 단점은 단점도 너무 많은데. (웃음) 한 가지 꼽자면, (본인한테 의미있는 단점? 영향이 컸던 단점이라고 해야 되나.) 음. 치안? 치안은 그닥 좋은 것 같진 않아요. 치안, 청결? 이런 것은 안 좋았던 것 같아요. 조금 위험하긴 해요. 제가 생각해도. 그래서 밤에 다니는 게 조심스러운? 우리나라는 밤에 다녀도, 24시간 간판 불 켜져 있고 그러니까. 거기도 뭐 간판이 켜져 있기는 한데, 한국이랑 느낌이 다르죠. 아무래도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 나라니까. 총기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노숙자들도 워낙 많으니까. 노숙자들이 진짜 많아요. 텐트치고 한 도로에 다 노숙자니까. 여자들이 살기에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다. 어떻게든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살아야지 해서 하숙집도 알아보고 그랬어요. 최대한 떨어진 데서. 제일 안 좋았던 건, 치안? 그리고 더러운거? 그거 빼고는 어느 도시를 가든 느낄 수 있는, 복잡한 그런 건 공통점인 것 같아서. 


Q. 거기서 광고디자인을 공부한거죠? 광고디자인이 전공 이름이에요?

광고디자인을 전공했는데, 광고를 하다가 그래픽 디자인으로 옮긴 케이스에요. 일단 광고디자인이 학교에 사람이 많지도 않았고 수업도 처음에는 재밌었는데 점점 별로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폭 넓은 그래픽디자인으로 넘어가보자 해서 조금 더 그래픽 수업을 들었던 것 같아요. 


Q. 어땠어요? 재밌었어요?

대학교 재밌었어요 저는. 결국 미대니까 밤샘하고 힘든 건 다 똑같은데 그래도 좋아하는거 하니까 밤샘해도 그 다음날 맛있는 것 먹고 풀리고 그런 건 있었던 것 같아요. 


Q. 그럼 이제 졸업하고 들어온거에요?

네. 졸업하고 1년 다 되어가나? 


Q. 뭐 했어요?

쉬다가 아 뭔가 한국은 취업준비 하려면 머리 아프더라고요. 뭘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어서. 알아보던 와중에 그래도 영어시험 하나 봐두는게 좋다고 해서 영어시험 하나 봐놓고. (웃음) 딱히 근데 뭘 준비하고 뭘 한 건 없어요. 거의 쉬고 충전하고. 충전을 많이 했죠. 지금 이제 면접보러 다니고 하고는 있는데 쉽지 않아요. 근데 그냥 원래 제가 살아온 것처럼 언젠가 되겠지, 올 해 안에는 되겠지 이러고 있어요. (웃음) (긍정적이어서 좋네요.) 그게 좋게 들릴 수도 있는데 생각이 없는 거죠. (웃음)


Q. 걱정이 없고 좋은 거죠. 그게 집안 성향이에요, 아니면 유학생활 하다가 변한거에요?

집안 성향인 것 같아요. 왜냐면 어떻게 보면 제가 게으르고 되게 느리고 애가 둔하고, 엄마 아빠는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저 자신을. 그럴 때 엄마 아빠가 옆에서 너 그러면 안 되지, 코치를 해줘야하는데, 코치를 잘 안하는 스타일? 넌 그런 애야 하고 기다려 주시니까. 그거에 대해서 어렸을 때는 안 좋아했었는데 요즘은 고마움이 더 큰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똥줄 타는 느낌 있잖아요. 뭔가 그렇게 안 하니까, 뭔가 기다려주고 지켜봐주니까 더 오히려 역으로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근데 집안 성향이긴 해요. 


Q. 왜 취업은 미국에서 안 하고 들어온거에요?

제가 잠깐 하긴 했었어요. 그게 학생비자로 어쨌든 미국에서 생활을 한거잖아요. 학생 신분에서 일을 하려면 또 비자를 신청을 해야 되는데 그 학생신분으로서의 일을 할 수 있는 비자 이름이 OPT인데, 그게 제가 무슨 전공이냐에 따라서 기간이 다 달라요. 저는 디자인이니까 1년? 엔지니어면 한 2년. 이런 식으로. 저는 디자인이라서 1년이다 보니까 주어진 1년 동안 취업준비를 해서 입사를 하는 기간이 총 1년인 거예요. 그래서 했는데, 쉽지가 않은 거예요. 회사 입장에서도 솔직히 자국민을 뽑지, 유학생을, 어차피 갈 애를 뽑지는 않잖아요. 거기서 오는 어려움도 있었는데, 되게 운 좋게,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거기 그래픽디자이너로 들어갔는데, 자선단체이다 보니까 연봉으로 나오는 돈이 아니라, 버짓으로 나오는 거죠. 소위 말해서 회사에 돈이 없는 거죠. 그래서 비자 얘기를 했어요. 비자가 만료기간이 1년이고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 라고 물어보고 알아보겠다 해서 알아봤더니, 할 수 있는데 연장을 하는 거죠. 연장을 하면 또 비용이 따로 있어요. 근데 정권이 트럼프로 바뀌면서 그게 좀 복잡해지더라고요. 제가 부담해야하는 돈이 50%가 있고, 회사에서 부담해야하는 돈이 50%가 있는데, 그게 얼마였지? 5000불이었나. 근데 문제는 그걸 제가 신청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닌 거예요. 그게 정권이 바뀌어서. 될 수도 있는 거고, 떨어질 수도 있는 거고. 이런 상황인거에요. 제 입장에서는 그 때까지도 저는 내가 미국에서 살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이 돈을 써가면서, 붙을 지도 모르는데,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해서 여기에 거는 건 아닌 것 같다 해서 의논을 했어요. 비자만료 되면 한국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회사도 그러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하자 해서 돌아온거죠, 비자만료 때문에.


Q. 원래 집이 어디라고 했죠?

원래는 안산시에 살다가 송도로 이사 온지 3년 됐나?


Q. 한국 오니까 어땠어요? 서울이랑 그동안 살았던 안산이나 송도를 비교했을 때는?

한국 오니까 좋았어요. 안산에서 살았을 때는 제가 거기 토박이었단 말이에요. 친구들도 다 안산에 살고 있고 그래서 지금도 만나는 친구들이 다 안산 친구들이란 말이에요. 안산에서 살았을 때는 저랑 엄마랑 얘기했던 적 있긴 한데, 뭔가 우물 안 개구리 인 것 같다고. 그게 확실히 안산이 깡촌도 아니고 도시도 아니고 뭔가 중간에 있는, 중간 사이즈의 도시? 엄마 입장에서는 그런 애매한 위치이다 보니까 사람들도 애매한 것 같다는 거에요. 사람들 대화방식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게, 예를 들면, 우리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 수 있잖아요. 근데 한정적인거에요. 동네에 워낙 오래 있었다 보니까 만나면 늘 하는 이야기가 부동산 이야기, 딸래미는 어디에 취직을 했고, 돈을 얼마를 벌고, 그런 것에서 오는 회의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엄마는. 저는 애들이랑 만나면 그런 차이점은 있었어요. 애들 입시 이야기하고 모의고사 이야기하는데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대학 와서도 그 때는 애들도 새내기였으니까 동아리, MT이야기하고 그런 이야기하면 전혀 모르잖아요. 걔네들과 멀어졌다 이런 느낌보다는 더 이상 낄 수 없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안산 가는 횟수가 줄었죠. 이사 오면서는 아무래도 송도에는 제 친구들이 별로 없으니까 딱히 사람들과의 교류는 없어요. 저 혼자만의 시간이 많고. 서울은 아무래도 유학 같이 했던 친구들이 많다 보니까, 그 친구들 만나러 서울 자주 오죠. 서울은 사실 제가 살았거나 사는 동네는 아니니까 익숙함은 없지만 이야기할 거리는 많죠. 아무래도 같이 학창시절을 보냈고 공유하는 게 비슷하니까. 그래서 그런 차이점이 있는 것 같아요. 도시마다. 


Q. 한국 돌아와서 뭐가 제일 좋았어요?

저, 집밥. 집밥은 늘 그냥. 왜냐면 미시시피나 노스캐롤라이나에 있었을 때는 일반적으로 한국음식이 먹고 싶다 이랬다면, LA는 한국 교민이 많아서 한식집 맛있는 데가 많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한식에 대한 욕구는 풀렸는데 엄마 집밥을 못 따라오는 그런게 있으니까. 그게 제일 좋긴 했어요. 집밥이 짱이에요. (웃음)


Q. 지금 본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취직이겠네요? 

네. 저는 지역은 저희 동네에서 알아보고는 있는데. 송도에도 회사가 있긴 한데 아무래도 좀 제가 원하는 디자인스튜디오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아요. 아무래도 서울에 몰려있다 보니까. 서울 쪽도 알아보고 있는데, 서울 쪽이 되면 서울로 오겠죠 아마. (웃음) 


Q. 어떤 스튜디오?

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다 다르니까. 저는 규모가 크고 작고 이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디자인은 회사 홈페이지 들어가면 포트폴리오 같은게 있잖아요. 저는 그게 되게 중요하거든요. 제가 꽂히면 지원하고 싶고 그런게 있는 것 같아요. 요즘 되게 빠르잖아요. 이례적이고 프로모션만 크게 하고 사라지고 그런 대형회사들은 많은데 제가 그거를 들어가기는, 그거는 별로일 것 같고. 좀 작아도 오래 일할 수 있는 그런 회사에 들어가고 싶은데 그런 회사가 많이 있지는 않더라고요. 예를 들면, 브랜딩 같은 것도 한 번 브랜딩을 하면 몇 십년 갈 수 있는 거니까, 오래 갈 수 있는, 뭔가 영속적인? 그런 가치가 있는 회사를 가고 싶은데 모르겠어요. 그런데서 저를 뽑아줄지. 


Q. 만약에 세종시에 그런 회사가 있다, 그러면 갈 것 같아요?

마음에 들면 자취를 하겠죠? (웃음)


Q. 저도 그렇고 다들 세종시 내려가는 것 되게 싫어하거든요. 어때요?

저도 가고 싶진 않아요. 굳이. (웃음) 웬만하면 변두리에 모여 있고 싶어요. 집밥은 그래도 먹고 싶은데.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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